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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여행] 분단의 아픔이 희망의 바람으로 승화된 파로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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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여행] 분단의 아픔이 희망의 바람으로 승화된 파로호

我空 2012. 11. 30. 05:00

화천은 해방과 함께 38이북 지역으로 북측에 편입 되었다.

625전쟁 이전까지도 인민군의 통치하에 있던 미수복 지역의

화천 원주민 중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생생이 기억 하고 있다.

 

1950년 6월 19일경 부터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한다

23일경 인민군 대부대가 이동하여 2개 사단 이상이 38선에 배치

되었다 한다.

 

그렇게 시작한 불법 남침 전쟁 6.25....

화천은 초토화 되고 민가 한채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었졌던 현장이다.

 

파로호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건립된 파로호 안보 전시관을 둘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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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생명을 지킨 현장에 세워진 파로호 안보 전시관은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1182-1번지에 있으며

당시 전투 현황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6.25 전쟁 발발을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 이북 괴뢰 불법 남침 " 이란 제하에 보도한 내용이다.


 전열을 가담듬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한군을 물리치자 중공군이 개입하고


1951년 5월이 들어서면서 중공군은 4월공세에서 실패후 이를 만회하기위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고 유엔군과 국군은 4월공세시 중공군의 공세를 정밀 분석하면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8군사령관은 4월공세 분석결과를 토대로하여 중부전선의 의정부 - 서울축선, 북한강을 이용한 서울 동부축선, 그리고 춘천 - 홍천 축선이 주요축선으로 판단하고 미8군의 주력을 배치하는 한편 동부지역에는 국군 6개사단이 산악을 이용하여 광정면을 방어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하였다. 그러나 5월 13일 정보원과 피난민들의 첩보에 대규모의 중공군이 동부지역으로 이동중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14, 15일 양일간의 비와 안개로 인하여 항공 및 지상정찰에 실패하여 중공군의 동부지역이동상황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전투력이 비교적 약한 한국군이 광정면을 담당하고 있는 동부의 산악지역이 서, 중부에 비하여 돌출되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4월공세에 대한 실패의 책임을 만회하고 유엔군을 고립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국군 배치정면을 집중돌파하여 산악의 잇점을 이용 포위섬멸하는 것을 택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국군 3군단이 붕괴되면서 한국전쟁사의 가장참혹한 전투로 기억되는 현리의 비극이 전개 되었던 것이다. 현리에서의 비극이 진행되고 있을 때 중공군의 조공부대가 주공부대의 현리작전을 지원하고 유엔군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하여 북한강을 이용한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때 국군 6사단은 4월공세시 사창리지구전투에서 크게 실패하여 전투력을 복원하고 용문산일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국군 6사단장은 사창리 전투에서의 불명예를 씻기위하여 강인한 훈련과 정신교육을 병행하던중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징후를 판단하고 주저항선인 용문산으로부터 12-17km추진된 홍천강일대 까지 진출 종심깊은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설욕의 대전을 준비하여 중공군 1개군 3개사단을 홍천강과 용문산 계곡에서 괴멸시키니 사단의 명예획복과 현리지구전투의 참패 만회, 그리고 중부전선에서의 안정이라는 전술전략적 승리를 일구어 냈다. 아울러 중공군의 5월공세는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더욱이 미8군은 지금까지의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는 전기를 마련하였고 중공군은 거의 붕괴되어 무질서한 집단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중공군은 더 이상의 공세를 펼 수 없게 되었고 이미 경강국도축선으로 투입된 중공군 20, 27군과 북괴군 2군단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고립될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유엔군의 밤낮없는 항공폭격과 포병화력으로 증원마저 어렵게 되자 드디어 5월 21일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중공군은 화천저수지 (이후 파로호)북방으로 철수하면서 주요목을 선정 철수부대를 엄호하는 지연작전을 준비하였다. 이에 대하여 훗일 중공의 공간사는 [ 이때 아군은 1개월내에 연속해서 두차례의 작전을 실시하여 부대가 상당히 지쳤으며, 탄약과 식량이 소진되고, 장마철이 다가와 강과 호수가 아군의 후방에 위치하여 상황이 급전되면 교통의 두절로 보급에 차질을 빚어 피해가 클 것이 예상되었다. 이외에도 금번 공세작전에서 미군의 연대단위 이상부대를 격멸하지 못하여 적의 반격도 우려되었다

 

 

 이런상황에서 아군의 공격은 적을 섬멸하수 없을 뿐만아니라 아군에게 불리한 요인만 증가할 것이므로 철수하는 것보다 못하였다. 따라서 아군은 주력부대를 휴식 및 재정비 하여 차후기회에 적을 결멸하기로 하고 5월 21일 공격작전을 중지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미 8군은 동부전선에 집중된 중공군을 분산시키고 전세를 만회하기위하여 서부전선에 대하여 철의 삼각지대를 연결하는 보급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2개사단 규모의 공격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유엔군사령관이 전선을 시찰한 결과 위에 적시된 사항들을 일부 확인하게 되었고 따라서 유엔군사령관은 5월 19일 미 8군에 전전선에 걸친 대규모 공격작전에 돌입하도록 작전지침을 하달하였다.

 

 

유엔군사령관은 정찰도중 중공군이 긴자루모양으로 과도하게 돌출되어있음을 확인하였으며 이 긴자루모양의 목에 해당되는 포천 - 철원축선의 영평일대, 춘천 - 김화축선의 화천일대를 조기에 점령하여 중공군의 목을 조르며 지대내에서 중공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파로호 전투는 이 시점부터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미 9군단은 가평 - 춘천을 연하는 선(토페카 선)이 점령되자 이어서 서측에서부터 미 2사단, 국군 2사단, 국군 6사단, 미 7사단으로 전투편성하여 공격작전을 개시 하였다. 특히나 이 전투에서 국군 6사단은 용문산전투의 대승으로 사기가 충천하였다. 국군 6사단은 북한강의 서측에서 춘천북방의 화악산 남측자락인 지암리를 목표로 하여 공격을 해 나갔다.

 

 

 이때 중공군은 무질서하게 철수하면서 춘천 - 화천을 잇는 도로와 계곡으로 몰려 들었고 유엔군의 공군은 쉴새없이 이들에게 폭탄을 퍼부었다. 이무렵 미24사단의 21연대, 미7사단의 17연대, 국군 6사단의 19연대는 화천-춘천, 가평 - 지암리 축선을 완전히 장악하므로서 남쪽의 아군 진출선과 함께 삼각형의 포위망을 형성하였고 이 포위망속에는 대규모의 중공군이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섬멸되었다. 마지막까지 소탕작전을 벌인 6사단 5연대는 5월28일 하루동안 중공군 포로 38000여명을 획득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당시 사단장 장도영장군은 "후퇴하는 중공군을 추격하여 길가에 늘어진 중공군을 쓰레기 줍듯이 트럭에 실어 담았으며 아군소대 병력이 적 대대병력을 무더기로 생포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라고 회상하였다.

 

그러나 이작전에서 화천점령이 지체되어 중공군을 완전히 포위하여 섬멸하고저 하는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만약이 전투에서 화천을 조기에 점령하고 파로호 이남에서 중공군을 완전 섬멸하였더라면 이후 휴전협상과 중공의 존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전투에서 중공군 62000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전화를 올렸으며 아군도 341명의 전사자, 부상 2011명. 실종 195명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상과 같은 戰果로써 6사단은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으며 중공군 포로를 많이 잡았다고 해서 구만리 저수지를 「破虜湖(파로호)」라고 명명하였고, 구만리 언덕 화천 발전소 뒷산에 李承晩 대통령이 친필로 쓴 전승비를 세우게 되었다

 

파로호를 한눈에 볼수 있는 전망대.....

 

 

오랑케를 물리친곳  파로호(破虜湖) ...

 

파로호는 평화롭기만 하고 많은이들이 즐겨 찾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근대 역사의 현장은 지금은 평화와 생명을 지키는 안보의 중심 도시에 묵묵히 프른 하늘을 행해 말을 한다.

"이제 다시는 이땅에 아픔과 슬픔,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해 주세요"

 

 

만들어 지지 말아야 할 평화으 댐으로 으로 파로호는 또 다시 수단을 겪고 내륙의 바다로 널리 알려진 호수는 죽음의 호수로 바뀌고

생명이 멈춘 죽음의 호수로 변해 갔다.

수많은 지역민과 군청의 노력으로 생명을 돠 찾아가는 파로호...

다시는 아픔의 역사를 말하지 않게 우리가 보호하고 아기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누군가 편안히 쉬며 파로호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을 벤치는

낙엽의 안식처가 되고...

도 다른 날들을 기다린다.

 

 

 

 

 

파로호 안보 전시관 앞뜰에 세워진 자유 수호의 탑

자유를 지키다 희생된 호국 영령들의 넉을 달래는 탑이다.

 

 

 

 

 

 

무명 학도병들의 희생을 추모하고자 건립된 탑이다.

" 길손이여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우리는 겨레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곳에 누워노라"

 

 조국과 자유를 지킨곳

파로호....

오랑케를 무찌른 호수...

 

 

 

 

 화천이 나은 시조 시인 이태극 시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에 이태극 기념관을 건립하여 문학의 도시로 위상을 높이고 있다

 

 

 

수많은 젊은피를 바쳐 지켜낸곳 화천발전소

1944년 일제가 건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댐 이다.

 

 

당시에는 대붕댐이라 하였는데

호수 형상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봉황을 큰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모양으로  대붕이라 며명 하였다고 한다.

 

 

 

평화의 댐 건설 당시 파로호의 수위를 낮추기 위해 댐의 중간에 구멍을 내어 물을 뺐다고 한다.

아직도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이당의 아픔을 대변 한다.

 

 

생명과 평화를 노래 하는 도 시 화천

이제는 평화의 메세지를 전세계에 전달하는 주최로서 역할을 다하며

이땅에 영원한 평화를 위해 새장을 열고 있다.

 

그대

평화를 갈망 할때 마다 이 종소리 하늘에 닿으리.....- 이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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